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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꿈을 지지해 준 가족들

1814년 프랑스 서북부의 해안지역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그뤼시에서 장 프랑수아 밀레가 태어났습니다. 성실한 농부였던 부모님은 가족들을 위해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판에서 일을 했고 할머니가 집안일을 돌보았습니다. 존경하던 성 프랑수아의 이름을 따서 손주의 이름을 지어주신 할머니는 손주인 밀레에게 성 프랑수아의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밀레의 삼촌은 성직자였고 그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12살 때 밀레는 라틴어 성경과 베르길리우스의 책을 즐겨 읽었는데, 실제 이 책이 밀레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는 농장에 나가서 일을 하면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렸습니다. 들과 숲은 마음에 들었지만 바다와 천둥은 무서웠던 어린 밀레는 비가 오는 날이면 집에서 성경에 들어있던 삽화들을 따라 그리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밀레는 바닥이나 담벼락 등 그림을 그릴 수만 있으면 어디에든 그림을 그렸는데 나막신에도 그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밀레의 아버지는 그의 예술적 재능을 진작에 알아보았고 그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평생 일만 하며 살았기에 아들은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밀레와 아버지는 셰르부르에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 그림을 보여주며 어떤 미술가의 제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는 미술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가 되려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와 어머니는 밀레에게 미술 활동에만 전념하라며 그를 밀어주셨고 그는 더욱 열심히 그림 공부에만 전념했습니다. 밀레는 여러 명의 스승을 거쳐갔는데 대부분 그의 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스승은 그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감명받아 셰르부르시의회를 설득하여 밀레의 후원에 앞장서주었습니다. 마침내 파리로 간 밀레는 들라로슈의 작업실에서 2년간 머물며 미술 공부를 했지만 그의 미술 세계가 워낙 독창적이라 스승에게 무언가를 배우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바르비종으로 간 밀레

밀레는 친구와 작업실을 내고 몇 년 간 힘든 시간을 보내곤 결국 1841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파리로 돌아갔지만 2년 만에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2년 후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그의 그림 모델이 되기 위해 농부의 옷을 몇 날 며칠이고 입고 있기도 하며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고 밀레도 하는 수 없이 총을 매야 했고,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파리를 떠나 예술가들의 마을이 있다는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바르비종으로 그는 남은 여생을 이곳에서 보냅니다. 바르비종에서 보낸 시절이 밀레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밀레는 오랜 세월 힘겨운 삶을 살아나갔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아내가 있어 행복했고 루소와 디아즈를 비롯한 바르비종의 화가들과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가난했지만 찾아오는 손님들을 항상 따뜻하게 맞이해 주며 풍족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밀레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레지옹 도뇌르라는 훈장을 받으며 부부가 함께 여행을 다닐 만큼 삶의 여유도 생겨나게 됩니다. 1870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파리 지역이 초토화되고 바르비종의 화가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는데 밀레 가족도 고향으로 갔다가 다시 바르비종으로 돌아오지만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875년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그가 인정받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는 점입니다. 밀레는 절친한 친구인 루소의 묘소 옆에 나란히 안치되었습니다.

 

농부의 삶을 화폭에 담다

밀레는 바르비종에서 남은 생을 그림을 그리며 보내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고 쟁기질하고 곡식 다발을 묶고, 숲 속에서 나무를 하는 모습들 하나하나를 화폭에 담아 갔습니다. 건장한 덩치와 농사일로 인해 거칠어진 손과 힘센 기운까지도 모두 빠짐없이 담아내었습니다. 밀레는 인생의 어두운, 힘겨운 면에 더 눈이 갔고, 그림 속에는 인물 2~3명이면 충분해 다른 불필요한 내용은 모두 빼고 오로지 들판과 농부만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은 일상에서 지켜보는 한 편의 시였고, 들판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중 '씨 뿌리는 사람'은 그중 최고의 시로 꼽을 수 있는데, 씨 뿌리는 사람은 이랑에 낟알을 던지며 리드미컬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밀레의 '만종'은 그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집니다. 이 작품은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보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쇠스랑으로 감자를 캐기 위해 흙을 걷어 내면 부인은 감자를 바구니에 담고, 멀리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남편은 쇠스랑을 땅에 꽂은 채 모자를 벗고 서 있고 부인은 서서 두 손을 꼭 모아 기도를 올립니다. 밀레는 그림에 수없이 덧칠을 했는데, 그림에서 종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이 작품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밀레는 워낙 가난했기에 만종을 그리고 나서 단 돈 몇 백 프랑에 팔았다고 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작품은 수십만 프랑을 호가했습니다. 밀레의 그림 중 '이삭 줍는 사람들'은 농부의 고단한 삶을 심도 있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857년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때 조화롭고 부드러운 색감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고 현재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세명의 여인이 초록색, 붉은색, 회색 계통의 옷을 입고 나막신을 신고 한여름의 눈부신 햇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여인은 편하게 몸을 굽혀 이삭을 줍고 있는데, 가장 오른쪽 여인은 몸의 자세나 어두운 표정에서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 있습니다. 추수꾼들이 흘린 이삭은 가난한 농민들이 주었는데 이 세 여인도 이삭 줍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밀밭과 옅게 구름 낀 하늘도 아름다운 이 작품은 당시 2000프랑에 팔았다고 하는데 그가 죽은 이후에는 30만 프랑을 호가했다고 합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밀레가 살아생전에 그 돈을 받았더라면 아마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