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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반-고흐-자화상-후기-인상주의-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과 화가가 되기까지 그의 행보, 화가로서의 삶 그리고 사후에야 인정받은 화가로 비운의 아이콘이기도 하지만 그는 현재까지도 거론되는 위대한 작품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과 화가가 되기까지 그의 행보

네덜란드 남부에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의 어린 시절은 여느 아이들과 바를 바 없이 평범했습니다. 화가로서의 재능보다는 곤충들을 관찰하거나 수집하며 분류하고 곤충 이름 외우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서를 좋아했던 반 고흐는 문학작품과 신학서적을 유달리 즐겨 읽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6세 때부터 '구필 화랑'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안정적으로 일하며 화상(그림장수)으로서의 앞날이 창창했던 그는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의 판화 복제본을 보고 어마어마한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밀레를 존경하여 '밀레 사부'라고 불렀으며 후에 고흐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구필 화랑에서 일하며 미술에 관한 생각 차이로 손님과 잦은 마찰을 빚던 그는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하게 되고 종교인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전도사가 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의 불안정했었던 정신으로 인해 무산되고 네덜란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야만 했지만,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노력하던 그는 선교단체에서 탄광의 광부들을 위해 희생하며 자신을 극단적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결국, 고흐는 본인이 미술을 더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27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동생 테오의 지원을 받으며 화가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화가로서의 삶

보편적으로 미술을 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를 다녀야 했지만 화가가 되기 위해 브뤼셀로 온 고흐는 화가 안톤 모베에게 그림지도를 받기도 했으나 대부분 혼자 그림을 그리며 공부했습니다. 구필 화랑에서 일하며 크게 감동받았던 밀레의 작품처럼 고흐는 어두운 색상으로 농민들과 노동자, 하층민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며 거칠고 어두침침하다는 평과 함께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외면하고 비난했습니다. 이후 일본의 우키요에(일본의 서민 생활을 나타낸 목판화로 일본에서 유행했다)와 파리에서 본 인상파 화가들을 접하게 되며 그의 그림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반 고흐는 아를에서 화가들과 같이 작업하는 공동체를 원하며 동료 화가들에게 공동생활을 제안하였는데 폴 고갱만이 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둘의 성격과 작품에 대한 견해 차이로 공동생활은 삐걱거렸습니다. 자연 그대로 그리는 리얼리즘이었던 고흐와 창작하여 그림을 그려내는 고갱의 그림 스타일은 너무나 달랐고 갈등이 점점 고조되던 어느 날,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르고야 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후 생레미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며 '별이 빛나는 밤' , '사이프러스 나무' 등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사후에야 인정받은 화가

불안정했던 정신과 신체적 건강이 더욱 악화된 반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37세의 나이에 결국 권총으로 자살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심장을 빗나가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즉사하지 않았고 멀쩡한 듯 보였으나, 이틀 후 감염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고 반 고흐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던 동생 테오 반 고흐도 형이 사망한 지 6개월 후에 형을 따라 세상을 뜨고 맙니다. 늦게 시작한 화가의 길이었지만 10년간 1000여 점이 넘는 스케치와 800여 점의 작품을 그려낸 열정적인 화가였던 빈센트 반 고흐가 살아생전에 판매한 작품은 너무 애석하게도 단 하나였습니다. 이렇듯 그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했던 화가였지만 그가 죽고 15년이 지난 무렵 동생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가 남겨진 고흐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회고전과 테오와 빈센트 간의 편지를 책으로 출간하는 등의 노력으로 인해 비로소 현재까지도 거론되는 화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을 돌아보면 참 안쓰러운 부분이 많은 화가라고 생각이 듭니다. 살아있던 동안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면 이렇게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짧지만 아주 강렬했던 그의 삶과 작품으로 인해 사후에라도 이렇게 재조명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