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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아담의-창조-시스티나-예배당-천장화

 

천재 예술가의 어린 시절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행정관이던 그의 아버지가 잠시 카프레세에서 근무를 했고 이후 다시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갔지만, 미켈란젤로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며 어린 미켈란젤로는 카프레세에 있는 유모에게 맡겨졌습니다. 유모는 석공의 아내였고, 그의 어린 시절은 채석장에서 정으로 돌을 쪼개고 석공을 구경하며 노는 시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느덧 공부할 나이가 된 미켈란젤로는 카프레제에 남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피렌체로 떠나야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서 가서도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일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예술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의 예술 활동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다 13살 무렵, 친구인 그라나치가 화가 기를란다요의 작업실에 데려가며 그의 눈에 띄어 제자로 들어가게 되지만, 오래 있지는 못 했습니다. 또한 당시 너무 뛰어난 미켈란젤로의 실력에 스승인 기를란다요가 미켈란젤로를 질투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몇몇 부유한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큰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예술 활동이 활발해지도록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했습니다. 그런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눈에 들게 된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궁전에 들어와 살며 일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이때도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미켈란젤로의 고집을 꺾지는 못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화려한 궁전에서 호의호식하며 로렌초의 아들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수준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됩니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내 오던 어느 날 로렌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메디치 가에서 나와 아버지에게 돌아갔고 그곳에서 자신의 작업장을 차리게 됩니다. 22살이 되던 해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조각상 하나를 만들었는데 많은 이들이 그가 남긴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송했습니다. 그 작품은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죽은 예수를 표현한 '피에타'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되고 피렌체 사람들은 그가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도시를 위해 예술 작품을 만들기를 소망했습니다. 피렌체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커다란 대리석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조각가가 그 대리석으로 작품을 만들려다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그 대리석은 미켈란젤로에게 넘어왔고 피렌체에서 꼬박 3년간 대리석 조각품을 만드는데 매진했습니다. 젊은 다비드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데, 다비드가 거인 골리앗을 막 공격하려는 순간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조각상의 높이는 무려 5.17미터에 이르렀습니다. 1847년까지는 광장에 세워져 있었지만 날씨와 바람으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작품과 노년기

역대 교황들은 바티칸 궁전 이곳저곳을 꾸미기 위해 이탈리아의 뛰어난 예술가들을 불러들였는데, 특히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바티칸 궁전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단번에 거절했는데, 본인은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라파엘로와 같은 화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율리우스 2세도 지지 않고 계속해서 미켈란젤로에게 작업을 지시하였고 완고한 교황 앞에서 결국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조각칼을 내려놓고 붓을 들어야 했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은 둥근 아치형이었고 교황은 성인들로 가득 채워 줄 것을 부탁했고 미켈란젤로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따라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평소 좋아하던 성경 이야기로부터 이 거대한 그림의 영감을 얻어 천장 중앙을 여러 구획으로 나눠 각 구획에 성경 이야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구획의 사이사이에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무녀들도 그려 넣었고, 천장화에는 총 3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중 '아담의 창조'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천장화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압도적이고 숭고한 힘을 느끼게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가장 사랑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가 남긴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조각품보다 천장화를 통하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뛰어난 실력과 강한 인내심을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후 클레멘스 7세가 미켈란젤로에게 벽화를 의뢰하여 '최후의 심판'이라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중앙 제단 뒤에 그려진 거대한 벽화가 바로 이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고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 완성되었습니다. 현대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심판은 사실 그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에 의해 수정된 일종의 수정본으로, 원래는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체 상태였지만 비오 4세 이후 재정립된 로마 전례 상 나체화가 허용되지 않아 인물들에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습니다. 조각뿐만 아니라 그림까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는 역시 다방면에서 뛰어난 천재 예술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평소 당파 싸움을 좋아하지 않던 미켈란젤로는 당파 싸움의 소용돌이가 몰아친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로마에서 보낸 노년은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예술은 아내이며, 작품이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독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에게도 노년에 아름다운 우정이 찾아왔는데 우아하고 재능 있는 비토리아 콜로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가깝게 지내며 흥미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시를 써서 주고받기도 하는 등 비토리아 콜로나는 미켈란젤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는 건축 작업에 전념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작업 의뢰를 받았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관한 모든 권한을 미켈란젤로에게 위임하며 건축 책임자가 된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초안을 살리면서 본인의 스타일과 뛰어난 감각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89세에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그가 사랑하던 피렌체로 옮겨졌습니다. 피렌체에서는 이 위대한 거장을 기리며 장례식을 치러 주었고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건축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16세기를 이탈리아 미술의 황금기로 만들었습니다.